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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펌] 故 장준하 선생의 의문사와 너무도 유사한 노 대통령의 죽음
    ★ History Salon/Currents, 정의(正義) 2014. 5. 28. 13:08

    예전글 옮깁니다. 참고 사진 주소가 바뀌어 깨지네요


    출처 역시 아고라....


    故 장준하 선생의 의문사와 너무도 유사한 노 대통령의 죽음 

     

    글: Doctor J

     

     

    故 장준하....

     

    그는 이 나라를 바르게 이끌고 갈 만한 몇 안되는 6~70년대의 재야인사였습니다.

     

    일제시절, 학도병으로 징병됐다가 가까스로 탈출하여 상해의 백범 김구 선생 밑에서 독립운동을 하셨습니다.

     

    오래 전부터 별명이 '박정희 킬러'였던 그는, 일제 패망 후에야 독립군이 되겠다고 온 박정희에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첫째, 박정희 당신은 만주에서 일본군 장교를 하면서 독립군을 얼마나 죽였는가?

    둘째, 일제가 패망하고 나서야 독립군이 되고자 하는 저의가 무엇인가?

    셋째, 일제가 패망하지 않았어도 독립군에 들어왔을 것인가?

     

     

    해방 후에는, 썩어빠진 이승만 정권을 향해 '사상계'라는 잡지의 칼럼을 통해 반박했으며,

    이러한 민주화를 향한 그의 노력은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정권시대에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이미 독립군 시절부터 자신의 킬러였던 이 눈에 가시같던 재야인사를 박정희가 가만 놔둘리가 없었지요.

     

    더군다나 고 장준하 선생은 국민들 사이에서 인기도 높았습니다.

     

    워낙에 창렴결백했고, 인물도 좋았으며, 무엇보다도 박식했습니다.

    당시의 재야 측에선 이미 그를 대통령 후보로 점찍고 운동을 벌이던 중이었으니.... 

    당시의 박정희 정권이 이 재야인사를 어떠한 눈으로 지켜 보았을지는 명약관화 아닙니까?

     

     

    1975년 8월 17일, 별 이유없이 감옥을 드나들며 수없는 고문을 당하던 그가 갑자기 사망했습니다.

     

     

    경기 포천군 이동면 도평3리 약사봉(사진 참조)을 등산하던 중 벼랑에서 실족사했다는 것이 당시의 보도였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겨우 55세.

     

    독립군 시절, 하도 산생활을 많이 해서 산 오르내리기는 도사 수준이었던 그가...

     

    등산이 유일한 취미여서 그 힘든 삶 속에서도 매주 등산은 빼놓은 적이 없다던 그가...

     

    젊은 후학들과 등산에 관심이 있어 하는 동호회 사람들에게 산을 타는 법과 내려가는 요령을 가르치는 일을 했던 그가...

     

    하필이면, 유신정권에 맞서 흩어진 재야와 야당을 통합하겠다며 '제 2의 100만인 개헌 서명운동'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어이없는 등산 실족사를 했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수사를 맡았던 서돈양 의정부지청 당직검사는, 故 장준하 선생이 벼랑에서 떨어져 귀밑 부분이 함몰되며 뇌진탕으로 숨졌다고 발표하며 수사를 신속(?)히 종결짓습니다.

     

    당시 이 사고의 유일한 목격자이며 등산팀의 일행이었던 김용환씨의 말에 의하면, 둘이서만 함께 하산하는 도중 경사가 급해 나무를 잡고 발을 딛는 순간 나무가 휘어지면서 장 선생이 미끄러져 15미터 아래로 떨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진술에 수많은 허점을 보였던 이 유일한 목격자는 이후 언론과 일체 담을 쌓은채 두문불출하며 살다가 몇 년 전 세상을 떴습니다.

     

    이 사망사고와 검찰의 사건경위 부분들은 납득할 수 없는 점들 투성이였으나, 당시의 유신독재 아래서는 그 어느 누구도 감히 그의 죽음에 대한 의혹을 본격적으로 제시할 수 없었습니다.

     

    80년대가 돼서야 '신동아'라는 시사잡지에서 그의 의문사와 진상규명에 대해 심층적으로 다룰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90년대 초반, '그것이 알고 싶다' 팀이 이 죽음을 다시 캐내어 만방에 알린 바도 있습니다.

     

     

    이 사건의 의문점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그렇게 높은 위치에서 굴러떨어졌음에도 사체 상태가 당연히 있었어야 할 골절상이나 혈흔 하나 없이 깨끗했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끼고 있던 안경도 깨지지 않았습니다.

     

    둘째, 머리에 난 상처는 추락하면서 입은 상처라기보다는 망치와 같은 둔기에 입은 상처같았다는 보고서 내용이 있었습니다.

     

    셋째, 유일한 사고 목격자라던 김용환 씨의 진술내용이 앞뒤가 안 맞고 내용도 매번 바뀌었다는 점입니다.

     

    넷째, 사고는 오후 1시에 났는데, 담당검사가 밤 한 시에나 도착해 컴컴한 상태에서 현장조사를 마쳤다는 점입니다.  

     

    다섯째, 당시 중앙정보부가 24시간 내내, 장준하 선생에게 사람들을 붙여 대놓고 밀착 감시하는 상황이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단 둘이서만 하산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는 것이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의문사를 보면서 34년 전 타계한 고 장준하 선생의 의문사가 떠오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 같습니다. 

     

    1. 등산(산행)을 간 후 죽음을 목격했다고 하는 이도 오직 한 사람

     

    2. 부상한 이를 옮겼다는 이도 오직 한 사람

     

    3. 사고가 난 이후, 가장 먼저 알렸어야 할 가족에게 알리지 않은 점

     

    4. 죽음을 정부측에서 먼저 알았다는 점 (장준하 선생의 경우, 사고가 나자 근처 군부대에 먼저 연락이 갔습니다)

     

    5. 그렇게 높은 곳에서 떨어졌건만, 별다른 외상이나 혈흔없이 머리에만 치명적인 상처가 하나 있었다는 점

     

     

     

    아무튼, 결론은 이렇습니다.

     

    70년대 유신독재 상황에선, 고 장준하 선생의 의문사에 대한 어떠한 진상규명도 가능하지가 않았습니다. 이제는 공소시효도 지났고, 유일한 목격자라던 사람도 끝까지 함구한 채 세상을 떴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다르죠.

     

    어떠한 일이 있어도, 우리 국민들은 이 의문사에 대한 진실을 알아야 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 의문사의 진상을 규명하는 일은 우리들 모두의 몫입니다. 반드시 진실을 밝혀내야만 합니다.

     

     

     

     

     고 장준하 선생의 묘 앞에 선 장남, 장호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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